스펄전의 이사야서의 복음이야기 4
스펄전의 이사야서의 복음이야기 4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사람들의 구주로 주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진정한 의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스펄전의 이사야서의 복음이야기 4』 중에서
📖 책 소개
오래 전에 스펄전의 신구약 성경 설교전집이 보문사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등을 통해 출판되었다. 하지만, 본 설교집은 몇 가지 면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다. 첫째, 새로운 설교가 모두 실려 있다. 현재까지 발표된 스펄전의 이사야서 설교문은 총 272편이다. 반면, 과거 설교전집에는 95편만이 실려 있다. 본 설교집에 187편의 설교가 새로 추가되었다. 둘째, 가독성을 좋게 하였다. 과거 설교집은 단락별로 너무 많은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본 설교집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편안히 읽도록 단락을 좀 더 세분화하였다. 셋째, 가급적 각 권당 설교를 10-13편 정도로 제한했다. 책이 두꺼울수록 읽는 데 지치기 쉽다. 넷째, 설교 원문에는 없는 성경 장절 표기를 대부분 삽입했으며, 필요한 경우, 현대 독자들의 이해 편의를 위해 당시 인물들의 출생과 사망연도와 약간의 해설을 추가했다. 다섯째, 현대인들이 누구나 이해하도록 12세 수준의 쉬운 번역 방식을 취했다.
스펄전의 설교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목회자들과 신학생 그리고 평신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설득 방식을 취하고 있다. 더불어 주석적, 영적 깊이도 충분히 갖추고 있기에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도 영적 성숙에 대한 상당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본서는 스펄전이 복음의 관점으로 신구약 성경을 설교한 것들을 번역한 것이다. 제목은 스펄전의 이사야의 복음이야기(4)이다.
📑 목차
💬 책 속으로
본문 속 깊은 은혜의 말씀과 명문장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사람들의 구주로 주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진정한 의문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 아기가 과연 '우리에게' 나셨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주어지셨는가? 이것이야말로 간절히 물어야 할 질문이다. 우리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 아기와 개인적인 상관이 있는가? 그분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그분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셨음을, 그분이 '우리에게' 속하였고 우리가 그분에게 속하였음을 우리는 참으로 알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매우 중대하고 엄숙하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라고 단언한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이 종종 그리스도와 맺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번민에 휩싸이는 반면, 이 일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 오만하게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나는 내가 가장 확신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가장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자주 목격하였다. 이는 옛 시절 런던(London) 시의 목사였던 사이먼 브라운(Simon Brown)이라는 경건한 사람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마음에 극심한 슬픔과 영적 침체를 겪은 나머지,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소멸해 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선한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그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설교하고 기도하고 사역하는 내내,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그가 설교할 때면 그의 눈에서는 풍성한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고, 그가 기도할 때면 모든 간구마다 신적인 열정과 하늘의 능력이 넘쳐흘렀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형편도 이와 같다. 그들은 경건의 모범 그 자체처럼 보이며, 그들의 삶은 존경스럽고 그들의 대화는 하늘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이렇게 울부짖는다. "내가 간절히 알기 원하는 한 가지, 자주 마음에 불안한 근심을 일으키나니, 내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분의 것인가 아닌가?" 이처럼 가장 선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하며 고뇌하는 반면, 가장 악한 사람들은 오만하게 자만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나는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이 들고 삶의 모순이 명백하고 노골적인 자들이, 마치 남들도 자기들처럼 쉽게 속아 넘어갈 줄로 여기며 이스라엘 안에서 자신들의 확실한 분깃과 오류 없는 소망을 떠벌리는 광경을 보아왔다. 우리는 이러한 무모한 만용에 대해 어떤 이유를 들어야 하겠는가? 다음의 비유를 통해 교훈을 얻으라. 바닷가 벼랑 끝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일단의 무리를 보라. 그 길은 매우 험하고 왼쪽에는 무시무시한 절벽이 가로놓여 있어 지극히 위험한 길이다. 말발굽이 단 한 번만 미끄러져도 그들은 파멸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만다. 말을 탄 자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길을 가는지, 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지 보라. 그러나 저기 한 기수를 보라, 마치 사탄과 장애물 경주라도 벌이듯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가! 여러분은 매 순간 말발굽이 미끄러져 그가 아래로 곤두박질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손을 치켜들고, "어찌하여 저리도 부주의하게 말을 모는가?"라고 외칠 것이다. 그 사람은 눈먼 말을 탄 눈먼 기수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안전한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토록 빠르게 질주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은 잠든 중에 몽유병으로 걸어 다니며, 다른 이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곳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우리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아찔한 높은 곳도 그들에게는 지극히 안전하게 느껴진다. 이와 같이 우리 가운데는 스스로 깨어 있다고 착각하는 수많은 영적 몽유병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깨어 있지 않다. 스스로를 과신하며 높은 곳으로 과감히 나아가는 그들의 오만함 자체가, 그들이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결에 걸어 다니고 말하는 몽유병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바르게 서기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할 질문이다.
내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명심하라. 외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면 내면의 변화도 전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어떤 나무로 데려가서 그 나무의 본성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여전히 들포도가 맺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여전히 들포도나무일 뿐이다. 만일 여러분에게서 소돔의 사과와 고모라의 포도가 보인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상상하는 모든 체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여전히 저주받아 파멸할 나무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삶 속에 나타난다.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회심을 입증하는 증거는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여러분이 행하는 바이다. 여러분 자신에게는 감정이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여러분을 판단하는 사역자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외적인 행실이 주된 기준이다. 동시에, 어떤 사람의 외적인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매우 유사할 수 있으나 그 사람 안에 참된 신앙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여러분은 거리에서 두 명의 검투사 배우가 칼을 들고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서로를 베고 찌르고 난도질하는 모습을 보며, 곧 살인이라도 일어날까 봐 가슴을 졸이지 않았는가? 그들이 어찌나 진지하게 싸우는지, 당장이라도 경찰을 불러 싸움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향해 무시무시한 일격을 가하면, 동료가 절묘한 타이밍에 방어막을 쳐서 능숙하게 막아내는 폭력적인 광경을 보라. 그러나 잠깐만 주의 깊게 지켜보라. 이 모든 베기와 찌르기가 미리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그 싸움에는 아무런 진심도 담겨 있지 않다. 그들은 진짜 적들과 싸울 때처럼 거칠게 싸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향해 몹시 분노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러나 잠시 그를 지켜보라. 그것은 단지 검투사의 속임수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정해진 순서를 벗어나 칼을 휘두르지 않으며, 그의 타격에는 아무런 진정성도 없고, 모든 것이 흉내 내는 연극에 불과하다. 검투사들은 공연을 마친 뒤 서로 악수를 나누고 멍하니 쳐다보던 군중이 던져준 동전을 나누어 가진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은밀한 곳에서 마귀와 악수를 나누고, 두 사기꾼은 전리품을 나누어 챙긴다. 위선자와 마귀는 결국 매우 좋은 친구이며, 그들은 서로의 이익을 보며 함께 기뻐한다. 마귀는 명목상의 신자의 영혼을 얻었기에 음흉한 미소를 짓고, 위선자는 재물을 얻었기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외적인 삶이 단순한 연극 무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죄를 향한 여러분의 적대감이 참되고 치열해야 하며, 저 괴물을 쳐 죽여 그 사지를 하늘의 바람 속에 내던져 버리겠다는 각오로 좌우로 칼을 휘둘러야 한다.
하나님이 단순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그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단순한 기쁨 외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격동시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천사들과 같이 노래할 수 없는 순수한 영적 존재들을 창조하셨을 때도, 그들의 행복을 보며 기뻐하셨으나, 그들은 너무 선하여 선악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없었기에 주님의 마음이 크게 요동치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허락된다면, 주님은 선과 악을 모두 아는 일련의 존재들로 자신을 둘러싸기를 갈망하셨다. 실제로 죄악 속에 빠져보고 그 아래서 쓰라린 고통을 겪어봄으로써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의미에서 그것이 악임을 깨달아 안 존재들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결코 악을 택하지 않고, 영원토록 자발적으로 선한 것만을 택하는 족속을 두기 원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압도적인 사랑의 빚으로 단단히 묶여 있기에, 악을 알면서도 그것을 한탄하고 죄를 짓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영원토록 생각이나 상상으로조차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그들에게 계시하실 사랑의 강권하심을 통해 흠 없고 온전하게 보존될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세상 끝날까지 그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주님은 천사들과 같지 않고 자신과 동떨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신비롭고 놀라운 자신의 아들들이 될 한 족속을 원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곧 독생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타락한 피조물들의 육신과 본성을 취하시고, 그 육신 안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들의 모든 죄의 죄책을 제거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의 육신을 통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연결 고리를 세우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게 하시는 것이었다. 영원토록 복되신 하나님이 첫째이시며, 그다음에 참되고 온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이 계셔서,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통하여 주님이 깨끗하게 씻겨 정결케 하실 저 택함받은 피조물들을 단단히 붙드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다 규명하여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의도하신 전부라고 단언하는 것은 내 소관도 아니고 그 누구의 소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적어도 이것이 그분의 목표의 한 부분이었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실로 신성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한 족속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악을 알아 하나님과 같이 될"(창 3:5) 존재들이며, 비록 악을 맛보았고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강권되어 그것을 한탄하고 영원무궁토록 하나님 곁에 머물며 선을 택하는 신적인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열심을 일깨운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계획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권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쏟아부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사역은 위대한 창조주께 합당한 사역이었으며, 그 어떤 사역도 보여주지 못한 방식으로 신성을 온전히 드러낼 사역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표현이 허락된다면(여러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건대), 주님은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여 예수님을 택함받은 무리의 왕으로 삼으시기 위해, 모든 신적인 에너지와 전능하신 능력을 총동원하여 스스로를 다잡으시는 듯하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 출판사 서평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편집부 서평스펄전의 설교들을 보면, 마치 16-17세기 청교도들의 위대한 설교들을 19세기로 옮겨놓은 듯하다. 설교 내용은 매우 예리하고 치밀하다. 성경 주석은 칼빈주의적이며 개혁적이며 복음주의적이다. 설교 방식은 영화의 한 컷 한 컷이 빠르게 진행되듯이 각 주제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래서 설교 길이는 길지만, 결코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다. 적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며 감동적이다. 나아가 신자들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회심을 위한 탁월한 적용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설교가 포스트모던 시대인 21세기 현재 선포되더라도 거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스펄전의 설교 원고를 오늘날 강단에서 몇 개의 예화만 고친 채 그대로 설교하더라도 회중들을 충분히 은혜의 용광로 속에 머물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 저자 소개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영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설교자로, "설교의 황태자(The Prince of Preachers)"로 불린다. 19세에 런던 뉴파크스트리트 채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그의 영향력 있는 설교로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이후 1861년, 5,000석 규모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성경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했으며, 명확하고 열정적인 전달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생애 동안 3,600편 이상의 설교와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영적 감화를 끼치고 있다.
🎓 역자 소개
나무와열매 번역실은 두 가지 번역 방식과 목표로 완성도 높은 번역을 추구한다. 첫째, 중학생 수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대부분 고전어 번역본은 현대인들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본 번역실은 기독교 고전들이 마치 오늘날 현대어로 집필된 것처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번역한다. 둘째, 복잡한 문장 구조를 단순화한다. 고전의 특징은 긴 문장으로 인한 복잡함과 난해함이다. 본 번역실은 원문의 의미를 온전히 살리면서도 단문 구조로 쉽고 명쾌하게 번역한다.
“기독교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영적 갈증을 겪는 모든 성도들이 생수의 강가에서 은혜를 누리도록 사명을 다하고 있다.
🏷️ 기본 정보 및 서지 사양
| 도서명 | 『스펄전의 이사야서의 복음이야기 4』 | 시리즈 / 권차 | 스펄전의 이사야서의 복음이야기 4 |
|---|---|---|---|
| 저자 (원저) | 찰스 H.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 옮긴이 (역자) | 나무와열매 번역실 |
| 출판사 |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 발행일 | 2026-11-09 |
| 쪽수 | 241쪽 | 판형 / 무게 | 128*188mm |
| 종이책 ISBN | 9791124736913 |
전자책 ISBN | 9791124736906 |
| 정가 (종이책) | 20,000원 | 정가 (전자책) | 10,000원 (약 33% 특별 할인) |
| 전자책 사양 | EPUB (리플로우) | 전자책 파일 크기 | 4.2MB |
| 직영 단독 혜택 | 출판사 직영 단독 스펄전 기념 책갈피 증정 + 안전 직발송 | ||
편집자의 기획 노트 (Editor's Note)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의 구약 대선지서·이사야서 명설교 완역본으로 깊은 영적 통찰을 선사합니다.
독자 리뷰 & 한줄평
독자 평점 ★ 5.0✍️ 이 책에 대한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아직 등록된 독자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 번째 리뷰를 남겨보세요!
배송 및 교환/반품 상세 안내
🚚 배송 안내
배송비: 기본 3,000원 (100,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출고 기간: 주문 접수 후 영업일 기준 1~2일 이내 출판사에서 직발송합니다.
🔄 교환 및 반품 안내
신청 기한: 도서 수령일로부터 7일 이내 교환/반품이 가능합니다.
파본 및 오배송: 출판사에서 왕복 배송비를 100% 부담합니다.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소개
도서출판 나무와열매는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깊이 있는 사유와, 계절의 끝에서 맺히는 결실처럼 풍요로운 문장을 독자 여러분의 일상에 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