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의 13.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복음이야기
13.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복음이야기
스펄전 명언 캘리그라피 책갈피 2종 세트
• 형식: EPUB (리플로우)
• 용량: 12.8MB | 기기: PC, 모바일(iOS/Android), 태블릿, 전자책 리더기
• 혜택: 결제 완료 즉시 마이페이지 및 주문 완료 페이지에서 영구 보관 & 다운로드 가능
이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헛된 일로 소란한다”라는 말씀으로 잘 설명된다. 그들이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라. 그들은 기쁨과 명예와 부를 얻고자 열심을 낸다. 그들이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며 일하는지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은 밤까지 등불 아래에서 머리를 써 가며 일하는가. 많은 사람이 생계를 얻기 위해 마음을 괴롭히고 영혼을 지치게 한다. 그들은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정작 삶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삶을 흘려보냈으며 실제로는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들은 얻는 데만 관심이 있고 누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얻게 되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두 배를 얻어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면 시기가 찾아온다. 시기는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마침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면 이제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이것이 걱정되고 저것이 염려되며 또 다른 일 때문에 괴로워한다. 내 말을 믿으라. 인생의 근심을 가장 많이 짊어지는 사람들은 사실 그것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져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는 말씀대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짊어지려고 한다. 마치 여행자가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튼튼한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굳이 나뭇단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 불필요한 짐을 더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은 파리의 증권거래소(Bourse)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증권거래소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후자를 보는 것은 더 어렵지만, 나는 파리의 거래소 위층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 적이 있다. 그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니는 군중을 보면서 나는 정신병원이 모두 비워진다 해도 저곳보다 더 큰 소란과 외침과 밀침과 분주함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그 광경이 더욱 광기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고 마치 다른 사람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거래소가 전 세계 상업 생활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 또 경쟁뿐이다. 모두가 싸게 사려고 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값을 깎으려 한다. 그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압박을 당한다고 불평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대로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것이다. 아, 이런 삶은 참으로 어떤 삶인가! 만일 다윗이 오늘 이 시편을 기록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문자로 썼을 것이다. “(진실로) 헛된 일로 소란하며”(시 39:6). 조금만이라도 고요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마음속의 모든 생각과 염려를 다 쏟아 놓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는 인내가 기쁨과 섞이고 기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된 소망과 섞인 채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여 헛된 일로 소란하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다윗은 삶을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잘 기억하라. 재물을 많이 쌓는 것이 결코 진정한 성공은 아니다. 여러분이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를 읽다가 어떤 사람이 얼마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기사를 보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믿지 말라. 그 사람이 죽을 때 가진 재산이 곧 그 사람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백만 파운드를 소유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사람일 수 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한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여러분은 “아무개는 죽으면서 20만 파운드를 남겼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도 죽을 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남기게 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죽을 때 이 세상 전체를 뒤에 남겨 두고 갈 것이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백만금과 모든 토지와 모든 보화를 뒤에 남겨 두고 갈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죽을 때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간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으며 사람은 무덤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재물을 많이 모으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라. 그는 “재물을 쌓으나”라고 말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는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한다. 단지 쌓아 둘뿐이다. 그는 즐거움 없이 축적만 한다.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편안히 살 만큼 필요한 것을 갖고 있다면 그 이상으로 가진 것은 수천 파운드이든 수천 개의 핀이든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는 실제 유익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큰 재산은 더 큰 안락을 주지 못한다. 그것을 지켜야 하는 새로운 걱정을 더할 뿐이다. 물론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세상과 그 재물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윗은 이것을 “재물을 쌓는 것”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것이 전부이다. 마치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를 쌓는 것과 같다.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더 큰 모래더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그는 안전에 대한 보장도 없이 재물을 모은다. 이것은 아마도 곡식을 베어 단으로 묶어 놓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농부는 그것을 곡간으로 옮기기도 전에, 곡식을 타작하고 빻기도 전에 밤중에 강도가 와서 모두 훔쳐 갈 수 있다. 구두쇠는 금을 쌓아 두지만 누가 그것을 가져갈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의 수고가 한 시간 만에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평생의 수확이 한순간의 경제적 공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그는 기쁨 없이 재산을 남긴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죽은 뒤 자신의 소유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모은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안다면 무덤 속에서 몸을 뒤척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생의 목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바로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간다. 자녀도 없고 후손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재산을 긁어모은다. 결국 이름도 잘 모르는 상속인을 위해 살아가는 셈이다. 만일 그 상속인을 실제로 알게 된다면 오히려 멸시할 만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람을 위해 종처럼 일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그 누구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참으로 슬픈 그림이 아닌가?
—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스펄전의 13.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복음이야기』 중에서
📖 책 소개
오래 전에 스펄전의 신구약 성경 설교전집이 보문사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등을 통해 출판되었다. 하지만, 본 설교집은 몇 가지 면에서 다른 특징을 지닌다. 첫째, 새로운 설교가 모두 실려 있다. 현재까지 발표된 스펄전의 시편 설교문은 총 439편이다. 반면, 과거 설교전집에는 143편만이 실려 있다. 본 설교집에 296편의 설교가 새로 추가되었다. 둘째, 가독성을 좋게 하였다. 과거 설교집은 단락별로 너무 많은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본 설교집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편안히 읽도록 단락을 좀 더 세분화하였다. 셋째, 가급적 각 권당 설교를 10-13편 정도로 제한했다. 책이 두꺼울수록 읽는 데 지치기 쉽다. 넷째, 설교 원문에는 없는 성경 장절 표기를 대부분 삽입했으며, 필요한 경우, 현대 독자들의 이해 편의를 위해 당시 인물들의 출생과 사망연도와 약간의 해설을 추가했다. 다섯째, 현대인들이 누구나 이해하도록 12세 수준의 쉬운 번역 방식을 취했다.
스펄전의 설교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목회자들과 신학생 그리고 평신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설득 방식을 취하고 있다. 더불어 주석적, 영적 깊이도 충분히 갖추고 있기에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도 영적 성숙에 대한 상당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본서는 스펄전이 복음의 관점으로 신구약 성경을 설교한 것들을 번역한 것이다. 제목은 스펄전의 시편의 복음이야기(13)이다.
📑 목차
💬 책 속으로
본문 속 깊은 은혜의 말씀과 명문장이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헛된 일로 소란한다”라는 말씀으로 잘 설명된다. 그들이 인생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라. 그들은 기쁨과 명예와 부를 얻고자 열심을 낸다. 그들이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며 일하는지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은 밤까지 등불 아래에서 머리를 써 가며 일하는가. 많은 사람이 생계를 얻기 위해 마음을 괴롭히고 영혼을 지치게 한다. 그들은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정작 삶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신이 삶을 흘려보냈으며 실제로는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들은 얻는 데만 관심이 있고 누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얻게 되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두 배를 얻어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걱정 속에서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되면 시기가 찾아온다. 시기는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마침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면 이제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이것이 걱정되고 저것이 염려되며 또 다른 일 때문에 괴로워한다. 내 말을 믿으라. 인생의 근심을 가장 많이 짊어지는 사람들은 사실 그것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져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는 말씀대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짊어지려고 한다. 마치 여행자가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튼튼한 지팡이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굳이 나뭇단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 불필요한 짐을 더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은 파리의 증권거래소(Bourse)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증권거래소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후자를 보는 것은 더 어렵지만, 나는 파리의 거래소 위층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 적이 있다. 그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니는 군중을 보면서 나는 정신병원이 모두 비워진다 해도 저곳보다 더 큰 소란과 외침과 밀침과 분주함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그 광경이 더욱 광기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고 마치 다른 사람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거래소가 전 세계 상업 생활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 또 경쟁뿐이다. 모두가 싸게 사려고 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값을 깎으려 한다. 그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압박을 당한다고 불평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대로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것이다. 아, 이런 삶은 참으로 어떤 삶인가! 만일 다윗이 오늘 이 시편을 기록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문자로 썼을 것이다. “(진실로) 헛된 일로 소란하며”(시 39:6). 조금만이라도 고요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마음속의 모든 생각과 염려를 다 쏟아 놓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는 인내가 기쁨과 섞이고 기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된 소망과 섞인 채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여 헛된 일로 소란하는 삶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다윗은 삶을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잘 기억하라. 재물을 많이 쌓는 것이 결코 진정한 성공은 아니다. 여러분이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를 읽다가 어떤 사람이 얼마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는 기사를 보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믿지 말라. 그 사람이 죽을 때 가진 재산이 곧 그 사람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백만 파운드를 소유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사람일 수 있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한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여러분은 “아무개는 죽으면서 20만 파운드를 남겼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도 죽을 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남기게 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죽을 때 이 세상 전체를 뒤에 남겨 두고 갈 것이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도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백만금과 모든 토지와 모든 보화를 뒤에 남겨 두고 갈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죽을 때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간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으며 사람은 무덤으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재물을 많이 모으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라. 그는 “재물을 쌓으나”라고 말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는 그것을 누리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못한다. 단지 쌓아 둘뿐이다. 그는 즐거움 없이 축적만 한다.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고 편안히 살 만큼 필요한 것을 갖고 있다면 그 이상으로 가진 것은 수천 파운드이든 수천 개의 핀이든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는 실제 유익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큰 재산은 더 큰 안락을 주지 못한다. 그것을 지켜야 하는 새로운 걱정을 더할 뿐이다. 물론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세상과 그 재물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윗은 이것을 “재물을 쌓는 것”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것이 전부이다. 마치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를 쌓는 것과 같다. 어떤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더 큰 모래더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그는 안전에 대한 보장도 없이 재물을 모은다. 이것은 아마도 곡식을 베어 단으로 묶어 놓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농부는 그것을 곡간으로 옮기기도 전에, 곡식을 타작하고 빻기도 전에 밤중에 강도가 와서 모두 훔쳐 갈 수 있다. 구두쇠는 금을 쌓아 두지만 누가 그것을 가져갈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의 수고가 한 시간 만에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평생의 수확이 한순간의 경제적 공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그는 기쁨 없이 재산을 남긴다. 시편 기자는 사람이 죽은 뒤 자신의 소유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모은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안다면 무덤 속에서 몸을 뒤척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생의 목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바로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간다. 자녀도 없고 후손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재산을 긁어모은다. 결국 이름도 잘 모르는 상속인을 위해 살아가는 셈이다. 만일 그 상속인을 실제로 알게 된다면 오히려 멸시할 만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람을 위해 종처럼 일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그 누구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참으로 슬픈 그림이 아닌가?
우리는 과연 기다렸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조급해지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뜻과 같아지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뜻을 따라주시기를 원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도 강한 자기 뜻이 있지 않았는가? 우리는 멍에에 익숙하지 않은 송아지처럼 행동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가시채를 걷어차듯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완고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기다리지 못했다. 오히려 근심하고 초조해하였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기보다 눈앞의 상황에 흔들렸다. 믿음보다 조급함이 앞설 때가 많았다. 과연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 인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인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인내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자신의 인내가 얼마나 작은지 드러난다. 불은 우리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체념을 시험한다. 시련은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내 궁전은 나무와 풀과 짚처럼 쉽게 무너져 버린다. 우리는 생각보다 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래 지고 온 십자가는 어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십자가가 놓이면 우리는 다시 몸부림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 높은 부르심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 노릇함과 고난받음을 함께 묶으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참음”(계 1:9)을 말한다. 그분은 인내의 왕 같은 본이 되셨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 발자취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가? 또한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기다리시는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그분은 고난이 깊어질수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시련이 커질수록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셨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눅 22:44).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때때로 기도를 멈추지 않았는가? 오히려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를 기도하지 않는 핑계로 삼지 않았는가? 연약함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데, 연약함을 이유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기도하는 법을 그분에게 배우자. “몸이 너무 아파서 기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간절히 건강을 위해 기도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짐이 너무 무거워서 기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짐을 질 힘을 구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결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내 슬픔이 너무 크니 지금은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기도 안에 여러분의 치료약과 복이 있다. 기도 안에 여러분의 위로와 새 힘이 있다. 기도 안에 여러분의 능력과 도움이 있다. 기도 안에 여러분의 인내와 확신이 있다. 영혼의 한밤중에도 일어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물 쏟듯 쏟아 놓자. 시험받는 성도여, 무릎을 꿇으라. 그러면 은혜의 보좌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비칠 것이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기도한 것처럼 기도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인내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지킬 것이다.
오늘 밤 그들은 자신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회개의 낮은 음조와 고백의 깊은 베이스음도 그들에게는 모두 새로운 것이다.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환희의 찬가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노래이다. 그들은 죄 가운데 살던 시절에 그런 악보를 읽어 본 적이 없다. 또한 거듭나기 전에는 그런 시편에 맞추어 자기 거문고를 조율해 본 적도 없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게도 얼마나 새로웠던지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한 번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 노래를 참으로 알게 되었을 때, 신앙의 무릎 위에서 자란 내게도 그것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악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았던 여러분에게 새로웠던 것만큼이나 내게도 새로웠다.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눈이 멀어 있었던 나는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눈이 멀어 있었던 여러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음악 속에서 귀가 먹어 있었고, 여러분은 불협화음 속에서 귀가 먹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노래가 새 노래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매우 진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경은 풍성하고 귀한 것들을 종종 새것이라 부른다. 새 언약이 있고 새 계명이 있다. 성경에는 너무나 귀하여 새것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지금 그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는 않겠다. 오,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는 참으로 풍성하고 귀하다. 만일 하늘에서 막 내려온 천사에게 이 땅에서 연주되고 불리는 온갖 음악을 평가해 보라고 한다면, 그가 무엇이라고 말할지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세상과 감각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가장 훌륭한 오페라와 가장 고상한 서정시도 그의 귀에는 서툰 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에는 불협화음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은 다를 것이다. 천지의 하나님을 높이는 시편은 그에게 참된 음악이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장 감미로운 음악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도 바로 그러하다. 우리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 노래는 결국 공허할 뿐이다. 그러나 주님을 높이는 수많은 성도들의 찬송은 우리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Augustine)이 밀라노(Milan)에서 찬송을 들었을 때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에 처음 들어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음악이 주님을 높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믿으라.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는 법을 배웠다면, 우리는 가장 귀한 노래를 배운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노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노래이다. 그리고 이 새 노래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새롭기 때문이다. 여러분을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주님께 싫증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일에 지쳐 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게는 싫증이 날 수 있다. 수없이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여러분은 그 주제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사람의 목소리는 단조롭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이름은 수많은 줄을 가진 거문고와 같아서 언제나 새로운 선율을 들려준다. 그 이름은 늘 새롭다. 오히려 나는 처음 들었을 때보다 지금 그 이름이 더 새롭게 느껴진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복음은 오래 알면 알수록 더욱 신선해진다. 그리스도를 오래 알수록 더욱 깊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거의 사십 년 전 그리스도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은 기쁨으로 뛰지 않았던가? 물론 뛰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깊이 뛰지는 않았다. 그 이름이 주는 음악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더욱 깊은 감미로움으로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수록 모든 것은 새롭게 펼쳐진다. 때로는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는 끝이 없다. 그 깊이와 넓이는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다. 여러분은 라인강을 따라 여행해 본 적이 있는가? 강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면 전혀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강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곳마다 새로운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도 이와 같다. 우리가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새로운 영광이 우리 앞에 열린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노래는 언제나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고백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고 가지만 나는 영원히 흐르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이름이 지닌 감미로운 선율도 이와 같다. 그것은 새 노래이다. 참으로 언제나 새로운 노래이다.
✍️ 출판사 서평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편집부 서평스펄전의 설교들을 보면, 마치 16-17세기 청교도들의 위대한 설교들을 19세기로 옮겨놓은 듯하다. 설교 내용은 매우 예리하고 치밀하다. 성경 주석은 칼빈주의적이며 개혁적이며 복음주의적이다. 설교 방식은 영화의 한 컷 한 컷이 빠르게 진행되듯이 각 주제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래서 설교 길이는 길지만, 결코 늘어진다는 느낌이 없다. 적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며 감동적이다. 나아가 신자들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회심을 위한 탁월한 적용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설교가 포스트모던 시대인 21세기 현재 선포되더라도 거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스펄전의 설교 원고를 오늘날 강단에서 몇 개의 예화만 고친 채 그대로 설교하더라도 회중들을 충분히 은혜의 용광로 속에 머물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 저자 소개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영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설교자로, "설교의 황태자(The Prince of Preachers)"로 불린다. 19세에 런던 뉴파크스트리트 채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그의 영향력 있는 설교로 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이후 1861년, 5,000석 규모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성경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했으며, 명확하고 열정적인 전달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생애 동안 3,600편 이상의 설교와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오늘날에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영적 감화를 끼치고 있다.
🎓 역자 소개
나무와열매 번역실은 두 가지 번역 방식과 목표로 완성도 높은 번역을 추구한다. 첫째, 중학생 수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대부분 고전어 번역본은 현대인들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본 번역실은 기독교 고전들이 마치 오늘날 현대어로 집필된 것처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로 번역한다. 둘째, 복잡한 문장 구조를 단순화한다. 고전의 특징은 긴 문장으로 인한 복잡함과 난해함이다. 본 번역실은 원문의 의미를 온전히 살리면서도 단문 구조로 쉽고 명쾌하게 번역한다.
“기독교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영적 갈증을 겪는 모든 성도들이 생수의 강가에서 은혜를 누리도록 사명을 다하고 있다.
🏷️ 기본 정보 및 서지 사양
| 도서명 | 『스펄전의 13.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복음이야기』 | 시리즈 / 권차 | 13.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복음이야기 |
|---|---|---|---|
| 저자 (원저) | 찰스 H.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 옮긴이 (역자) | 나무와열매 번역실 |
| 출판사 | 도서출판 나무와열매 | 발행일 | 2024-05-10 |
| 쪽수 | 325쪽 | 판형 / 무게 | 128*188mm |
| 종이책 ISBN | 9791124476444 |
전자책 ISBN | 9791124476444 |
| 정가 (종이책) | 22,000원 | 정가 (전자책) | 10,000원 (약 33% 특별 할인) |
| 전자책 사양 | EPUB (리플로우) | 전자책 파일 크기 | 12.8MB |
| 직영 단독 혜택 | 스펄전 명언 캘리그라피 책갈피 2종 세트 | ||
편집자의 기획 노트 (Editor's Note)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의 명설교 전집으로, 영혼에 생명수와 같은 깊은 은혜를 선사합니다.
독자 리뷰 & 한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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